4. 처용단장(處容斷章)
- 김춘수
1의 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1의 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시집 ?처용?, 1974)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인 김춘수를 제2의 이상(李箱)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가장 첨단적인 현대시의 기법을 구사하여 무의식 세계의 이미지를 구상화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진폭을 새로이 개척, 확대했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평가이다. 그는 비유적 이미지를 버리고,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로써 일종의 시의 순수한 상태 곧 무의미의 시, 절대시를 이룩하려 시도했다.
이 시는 어떤 주제 의식이나 특정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고, 오직 심상만을 제시하고자 감각적인 언어들을 동원하고 있다.
▶ 성격 : 이미지즘, 회상적
▶ 어조 : 과거의 인상을 서술하는 어조
▶ 「1의2」의 구성 : 단련시
▶ 제재 : 남쪽 바다에 대한 추억
▶ 주제 : 삼월의 남쪽 바다에 대한 추억의 심상화.(감각적 체험 내용의 심상화)
<연구 문제>
1. ㉠은 어떤 소리인지 이 시에 나오는 한 시행을 사용하여 3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듣는 환청(幻聽).
2. 이 시에 나타난 심상의 특징을 7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비유를 통하여 새로운 관념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들이 감각적으로 어울려 이루어내는 이미지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서술적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다.
3. 이 시의 화자를 ‘처용’으로 잡은 의도를 70-10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고향인 ‘바다’를 떠나 서라벌 땅에서 소외감(또는 고독) 속에서 살아온 처용의 생애가, 동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낸 시인의 유년기와 상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 이 시에서 여성적인 이미지를 드러내는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
<감상의 길잡이>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김춘수 시인은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해 왔다고 고백한다.
이 시는 서술적 이미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시의 내면에는 어떤 관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미지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관념이 배제되었다고 해서 <시문학파>의 순수시를 생각해서도 안 되고, 이미지를 중시한다고 해서 김광균이나 김기림의 주지시를 연상해서도 안 된다. 김춘수의 이른바 ‘무의미의 시’, ‘존재의 시’는 언어와 언어가 부딪쳐 유발하는 미묘한 감각적 심상을 위주로 하고 있으면서도 객관적 형태의 사실적 묘사를 위주로 하지 않음으로써 등장하는 사물들 간의 관계가 서로 먼 거리를 가진다. 따라서, 개별 시행 속에서 관념이나 의미를 추출하는 데 익숙한 독자에게는 난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의 경우, 이미지를 이루는 주된 사물은 ①삼월의 눈, ②라일락 새 순, ③산다화, ④겨울 털옷, ⑤남쪽 바다, ⑥물개의 수컷, ⑦그 울음 소리, ⑧수렁, ⑨보얀 목덜미 등이 있다. 이들이 의미의 고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적 감각으로 어울려 추억(또는 무의식) 속에 아련히 잠재해 있는 ‘눈 내리는 삼월의 남쪽 바다’의 정경이 인상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에서 ‘물개’는 ‘바다’와 어울리는 이미지이고, ‘수컷’은 ‘바다’가 주는 ‘ㅂ’음의 언어 감각과 ‘수컷’의 ‘ㅋ’음이 주는 언어 감각을 어울리게 하여 ‘바다’에 더욱 싱싱한 이미지를 부여했다. ‘우는 소리’는 슬픔이나 비애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보다는 다만 가슴에 부딪치는 울림, 곧 심상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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