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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북구 동 유래

인보 2005. 11. 5. 22:22
 
고성동 칠성동 침산동 노원동 산격동 복현동 대현동
검단동 무태동 동변동,서변동 연경동 조야동 노곡동 매천동
팔달동 사수동 금호동 관음동 태전동 구암동 동천동
학정동 국우동 도남동 동호동 읍내동 칠곡동  
 
고성동
흙으로 축조되었던 대구읍성이 임진왜란 후에 석조로 개축되어 1906년 박중양에 의해 허물어질 때까지 대구부 성으로 대구를 수호하였고. 고성(古城)은 대구성에 연유하고 있으며, 일설에는 신라중엽 김유신이 백제 군과 싸웠던 토성에 연유하였다고도 합니다.
칠성동
칠성동의 유래는 선사시대 지석묘인 칠성바위에 연유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정조19년(1775년)에 경상감사 이태영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어느날 밤 꿈에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광채를 내면서 밖에 떨어졌습니다.

비록 꿈이지만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별이 떨어진 북문밖으로 나가보니 어제까지 없었던 7개의 큰 바위가 북두 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감사는 필시 좋은 징조라 여기고 7개 바위에다 일곱 아들의 이름인 희갑, 희두, 희평, 희승, 희준, 희장, 희조를 하나씩 새겼는데, 이상한 것은 일곱 아들이 차츰 성장하면서 얼굴이나 성품이 새긴 바위를 닮아 갔습니다.

그 뒤에 후손 이 희두(羲斗)역시 경상감사가 되어 선조의 기적을 영구히 전하기 위하여 칠성바위 주위에 나무를 심고 중앙에 정자를 세워 의북정(依北亭)이라 하였다. 그러나 의북정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락해 헐려 버렸고 자식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부귀다남을 비는 토속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침산동
침산의 동북쪽 금호강과 신천이 합류되는 이 곳을 옛날에는 백사부리 라고 불렀습니다. 이 백사부리 빨래터에서 빨래하던 아낙들이 하늘을 쳐다보니 산이 날아와서 앉았다고 하며, 빨랫돌이 많다하여 방칫돌, 다듬잇돌 침(砧)자를 넣어 침산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설에는 신천 하구를 지키는 야산을 수구막이 산, 생긴 모양이 방아처럼 생겼다하여 침산으로 불렀다고도 합니다.
노원동
조선초기에 교통기관인 역원 중 대노원이 있었던 자리라서 원대동이라고 했으며, 이곳은 원래 원대들로서 노곡동 주민들의 농토로 이용되어 왔으나 마을이 형성되면서 원대동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1975. 10. 1에 북구에 편입되면서 노곡동과 원대동의 첫 자를 따서 노원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산격동
산격동은 본래 대구부의 동중면 지역으로 뒷산이 매의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옛날에는 "미지미"라는 순 우리말로 불리어 졌습니다. "미지미"는 "메잠"이며 "메잠"은 산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한문으로 명명하게 되니 산격(山格)이 되었다 합니다.

한편으로는 연암산이 우뚝 솟아 아래로 절벽이 끊어지면서 앞에 금호강과 넓은 평야가 펼쳐져 연암산이 사이를 가로 막는 간격이 벌어져 있다하여 산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복현동
야산에 보선암 혹은 복현암이라는 넓은 바위가 있었는데 선녀가 이 바위에 내려와 놀다가 보석을 빠뜨리고 승천했다고 해서 보선암이라고도 하였느데 복현은 바위인 복현암에 연유한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경주 이씨 무실공이 난을 막아 일등공신이 되었을 때 영조가 하사한 땅으로 엎드려(伏) 현모(賢) 한다는 뜻으로 지명을 복현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대현동
동구 신암동에서 1975. 10. 1북구로 편입되면서 국립대학인 경북대가 자리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여 큰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현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즉 "크게 배우는 자가 많으면 현인이 많은 것(大學者多則賢人多耳)"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검단동
1870년경에 순흥안씨(順興安氏)와 우계이씨(羽溪李氏)가 이 마을을 개척, 조선시대 말까지 금단(琴檀)이라 불러오다 한일합병 후 검단(檢丹)으로 불렀습니다.

조선조 후기에는 동중면(東中面)에 속했으며 삼한시대 말기 기원 3∼4세기에 현재의 산9-13번지 일대에 검단산성(檢丹山城)이 축성되었으며 지금은 남쪽 구릉위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무태동
고려태조 왕건이 동수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여 도주하면서 부하들에게 쉬지말고 빨리가 자(無怠以促足)고 독촉하면서 무태라고 했다고 하면, 한편으로는 왕건과 신숭겸장군이 밤길을 가면서 이 마을 아낙네가 야밤에도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있어 칭찬하여 게으름이 없다(動織組而無怠平)는데서 무태(無怠)라 하였다고도 합니다.
동변동,서변동
동화사에서 내려오는 동화천의 동편에 위치한다하여 동변, 서편에 있다하여 서변동이라 불려지고 있습니다.
연경동
퇴계선생 제자들이 서당을 세워 공부하다가 서원으로 확대하여 경(經)을 연마하던 동네란 데서 연경동이라 불리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을 지날 때 마을에서 글 읽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고 하여 연경이라 불려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조야동
뒷산의 모양이 함지박과 같다고 해서 "함지산"이라고 하고 아랫마을은 "함지마을"이라고 하였으며. 약300년 전 민란과 흉년을 피해 김해김씨 상후공이 청도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했으며, 그는 문중간에 서로 도우면서 살아라(門中爲助也)라는 교훈에서 후손들이 동명을 조야라 하였다고도 합니다.
노곡동
일명 노촌(蘆村), 노노촌(老老村), 논어실이라고 함. 마을 뒷편에 함지산이 있고 그 중턱에는 노곡산성, 일명 팔거산성이 있는데 동네에서는 도덕봉, 관니산성(冠尼山城)이라고 하면서 동명을 공자(孔子)의 고향인 노(魯)나라 취곡(取谷)이라는 뜻으로 노곡(魯谷)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매천동
400여년전 합천·야로 지역에서 야성 송씨가 현재의 태전교 남쪽 문주마을에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로서 현재 매천1동은 매남(梅南)에서, 매천2동은 송천(松川)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조선 광해군 때 아헌 송일기선생이 사간원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폭정을 간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자신의 호를 벙어리라는 뜻에서 아헌(啞軒)으로 고치고 지금의 매남동 지역으로 내려와 매양서원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 하였다는 데서 매남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고,

인조 때 성주지역에서 양성송씨들이 이주하였고 매천2동은 앞의 팔거천과 뒤쪽 소나무로 둘러 쌓였다는데서 송천(松川)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해방 후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 때 매남과 송천을 합하여 매천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팔달동
현재 구안국도 변에 위치한 자연부락으로 400여년 전 성주 배씨가 이주하여 장태실과 작원동을 형성하였으며 그 명칭은 금호강의 지류인 팔거천과 당시 행정명인 달성군에서 그 머리자를 따서 팔달동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사수동
지금의 대구광역시와 지천 경계지점으로 장기터와 샛터로 형성된 자연부락으로, 금호강과 주위하천으로 둘러싸여 비가 많이 올 때는 자주 침수되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마을입니다.
금호동
340여년 전 달성군 서재면 세천동으로 살던 선산 김씨가 이 지역으로 내려와 마을을 형성하여 태전교 남쪽 금호, 사수동 까지를 문주마을 이라고 하였는데, 일제 때 금호강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금호동이라고 불렀습니다.

금호라는 명칭은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에 적합하여 다른 지역주민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많이 모여들었다느데서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관음동
지금은 없어졌지만 약 500여년 전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관음동이라 합니다.
태전동
태전동은 일제시대에 행정구역을 조정할때 지당, 수평, 큰 이매, 작은 이매 등의 자연부락을 합쳐 형성 되었고, 또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태복산 밑에 많은 콩밭을 이루었다고 해서 태복산의 태(太)와 밭 전(田) 을 따서 태전동이라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며, 혹은 콩 태(太)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태복산은 이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높은 산이며, 현재는 태전교 좌우로 갈라져 있습니다.
구암동
비둘기처럼 생긴 산이 있는 동네라 하여 구암동이라고 부릅니다. 한편으로는 함지산 부근 숲속에 열매가 풍부해서 비둘기 떼들이 모여들어 주위의 바위를 하얗게 만들었다는 데서 연유한다고도 하며, 구암동 뒷산에 비둘기가 많이 와서 울었다고 구명(鳩鳴)이라 하였는데 구(鳩)자와 운암동(雲岩洞)의 암(岩)자를 따서 구암동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동천동
이 마을의 서쪽에는 대천(大川)이 흐르고 있는데, 동천동이라는 이름은 이 대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학정동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며 학이 머문다는 뜻의 학정동(鶴停洞)이었으나 학은 사람이 가면 날아간다하여 인변(人)을 없애고 마을의 들에다가 정자를 세워 정자 정(亭)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들 바깥 마을이란 데서 들밖마라고도 부르는데 현재 이 마을에는 학인산(鶴翼山)도 있습니다.
국우동
국우동이라는 이름은 반포천에서 흐르는 물이 들을 적시어 국가의 살림을 넉넉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국우동의 옛이름이 '구우리'라 불렀는데 그 뜻은 이 곳에 아홉 마을이 있어서 구우리라 불렀다고도 합니다.
도남동
도덕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도남동이라 불렀다 합니다.
동호동
고려 후기 즉림칠현의 은둔 사상을 본받아 낙향하여 강을 낀 마을에 은거하면서 낚시로 세월을 보내러 온 은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선비들이 즐겨 읊조리던 시(時)에는 동호(東湖)라는 시구(詩句)가 들어 있는데 전국적으로 시구를 본 딴 동호라는 지명이 130여곳이 있다고 합니다. 동호동이라는 이름도 이렇게 붙여진 지명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읍내동
원래 이 마을은 칠곡도호부 관아가 있던 읍내였다.읍내동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칠곡동
신라 경덕왕 이전에는 북치장리(北恥長里), 인리(仁里), 팔거리(八居里)라고 하였다가 고려 현종때 팔거로 하였는데 별호로 칠곡(漆谷)이라 하였으며,

조선 인조때 도호부를 설치하여 칠곡부사를 두어 지금 의 관음(觀音), 동호(東湖), 학정(鶴亭), 동천(東川), 읍내(邑內)동 일 부를 팔거면으로 칭하고 태전 (太田), 매천(梅川), 팔달(八達), 금호(琴湖), 사수동(泗水)을 문주면(文朱面)으로 칭하고 도남(道南), 국우(國憂), 관음(觀音), 동천(東川)과 읍내동 일부 를 퇴천면(退川面)으로 칭하여 오다가

1914년 4월 10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3개면을 병합하 여 칠곡면이 되었다가 1980년 12월 1일자로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1년 7월 1일자로 대구 직할시에 편입되었다.
칠곡(漆谷)이라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옻나무골"이라 알고 있으나, 실은 일곱 골짜기로 형성되었다 하여 七谷이다.

지금은 신도시로 한창 개발되고 있으나 신라 때에는 팔리현, 고려때에는 팔거현으로 땅이 기름져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교통의 요충지이며 조선조 선조26년에 경상도 지방을 총괄하는 경상감영이 설치되기도 한 유서 깊 은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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