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예사 (외 4편)
유계영
이삿짐 속에서 늙은 의자가 넘어진다
전생의 재채기가 전생의 발가락이 한꺼번에 튀어나온다
의자는 다리보다 많은 발가락을 가졌었다
늙은 의자가 거리의 토마토 속에서 어린이를 골라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거리는 신발을 신지 않은 무리를 넘어뜨렸다
그들은 발바닥에 빛이 달라붙을 때까지 토마토를 던졌다
허공의 토마토를 전부 받아내기에 의자는
부드러운 피부를 가지지 못했다
이삿짐 속에서 세 개의 원반이 떠오른다
늙은 의자는 그중 하나가 반드시 모조품임을 안다
이미 죽은 적 있는 나무들과 사람들이 서로 기대며 걸어간다
늙은 의자의 발목이 부러진다
가능한 자세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래된 오렌지
1.
이곳의 문들은 어떤 퇴장도 기억하지 않는다
혀를 빼 무는 것과 보조개가 팬 붉은 뺨을 금지한다
격자무늬 커튼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행동을 금지한다
그러나 복도식 아파트를
몸을 생략하고 줄지어 않아 있기를 좋아한다
한밤중에 모일 것
타이어가 거꾸로 박힌 모래판 위로 달빛이 쏟아지듯이
오색만화경을 쓰고 튀어나올 것
입술 너머로 넘어진 말들이 거대한 바퀴가 되기까지의 모든 입술
2.
우리는 문밖에서만 이쁜 아이들
인사는 잘하고
맑은 날에는 유리창과 축구공을
흐린 날에는 우산과 목마름을 튀기며 몰려다녔지
복도식 자정을 박살내면서
유리창은 깨지기 전 아주 조금 휘어진다는 걸 알았지
재미를 위해서라면 오늘보다 먼 미래는 없다고 믿어
가끔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검은 뿔을 입고 나타나는 녀석들
못 말려 그들은
아침이 오면
우리가 훔친 물건들이 화단 가득 피어날 거다
3.
아파트 복도에 나란히 호랑이사자흑표범토끼, 토끼
누군가 유리창에 붉은 얼굴을 뭉개보고 있다 불빛, 불빛
휴일
몸에 딱 맞는 의자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친 남자의 날
완성했는데 초대장이 세 줄을 넘기지 못해 죽었고
의자의 구조를 못 견딘 못이 하나 튀어올라 박혔고
단 하나의 못이 튀어올랐을 뿐인데 몸에 무수한 못이 단숨에
남자의 죽음은 세 줄 이상의 이유가 없어
넘겼어?
못 넘겼어?
이목구비가 참 또렷하세요
웃는 무덤은 첨 봐요
몸에 딱 맞는 의자죠
생일과 기일이 일치하는
초대장이라면 난 못 받았을 거예요
흥미로운 소문은 주소가 필요 없죠
섰어?
앉았어?
의자들은 몸의 눈치를 너무 많이 살펴왔다 싶겠군요
때마침 집배원의 커다란 가방 속에서 순서 없이 흐트러지는, 엽서들
당신은 절대로 묻히지 않죠
무게 없는 형태로 앉아 있는 나무
잘 닫혀 있는
너도밤나무
뒤통수에 대고
우리 동네 놀이터에는
누구와도 나누기 싫은 사탕이 호주머니 속에서 녹고 있다
꽉 끼는 바지 입은 남자에
빨간색 물방울무늬 구두 신은 여자애
둘이서만 노는데 각각 세 시에 아홉 시에 자란다
사고치고 난 뒤 아파서 몰랐다 말하는 것은
녀석들이 재미있어하는 거짓말
절대로 맞힐 수 없는 수수께끼의 정답처럼
나는 매 순간 나를 흘린다
만질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도록 태어났다
(계절은 맞지 않는 모자를 쓰고 비틀)
나는 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이 나무를 거울이라 우겨도 좋겠지
아끼는 손거울이 깨지고 만 건
얼굴에 얼굴을
너무 가까이 대고 말한다고
파편들이 알아서 더 많은 얼굴을 흉내 낸다
우리 동네 놀이터에선 여자가
빨간색 물방울무늬를 흘리고 서 있다
바지 무릎 뒤에 접힌 주름의 개수만큼
여자는 남자에게 애칭을 붙여준 적이 있다
여자는 더 뚱뚱한 여자가 태어날 때까지
무궁무궁 자란다
참새들이 맴을 돌며 지긋지긋함에 대해 노래 부른다
아이들의 꾀병을 이해하는 건 나뿐
이건 누가 흘린 표정일까
죽은 쥐들의 뼈가 튼튼하게 쌓여 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나뭇가지가
바람을 꼭꼭 접어놓는다
달콤, 달콤 우리의
생략된 뒷장면
쥐
방 안의 불을 다 켜두었는데 어두워
나는 스케치북 오른쪽 가장자리에만
태양을 그리는 습관이 있지
아무리 닦아놓아도 저무는 창문
내일의 태양은 장롱 속에서 검은 상자를 뒤집어쓰고 있다
나의모자는 빛나는 모서리를 가졌네
투명해질 때까지
입 안에 든 젤리를 굴리며 밖을 살핀다
의자는
젖은 수건을 두른 어깨처럼 비어 있다 직사광선이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고 구부러진다 창밖의 아이들이 공깃돌의 뚜껑을 열고 모래를 채운다 그들의 허밍엔 ㅈ발음이 가장 흔하다 글쎄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더니
사라지지 않는 왼쪽 귀를 얻게 되었어
신발에 맞는 발을 고르러 나간 언니는
돌아오지 않고
의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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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외 4편)
황인찬
그는 내가 눈이 맑다고 했다 그는 내가 보호받고 있다고 말했다
저녁 다섯 시,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는 내 말을 듣기를 원했다 그는 내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내
가 행복해지기를, 그가 내 위안이 되길 원했다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할래요?"
그가 한 말이었다 그는 내게 좋은 곳에 가자고 했다 그는 내가 거
기서 더욱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나는 좋은 곳을 믿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저녁 다섯 시, 나는 돌아온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듀얼타임
그것은 함께 공원을 걸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중앙공원의 분수대 앞에 있었다
너는 센트럴파크의 분수대를 지나갔다
네가 한낮의 공원에 서 있으면
나는 어둠에 붙들리고
개를 데리고 나온 여자가 개를 놓쳤다
그러자 그곳에서 자전거가 쓰러진다
우리는 함께 공원을 걷고 있었다
여자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올 때
점점 짙어지는 어둠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무엇일까, 마주잡은 반쪽의 따뜻함은
갑자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내가 어둡다. 말하자
네가 It's dark. 말한다
개종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에 나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의 안쪽에는 나와 기원이 있었다
나는 기원을 바라보며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 물었다
기원은 내게 잘못된 일은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올 여름의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했다
아무런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흑과 적의 세계
합병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우리 아버지의 심장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검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검은 피는 검은 발을 만들고, 검은 손톱을 만들고, 검은 얼굴로 웃게 만든다
탁자 위에 놓인 심장이 거기서 개심한다
흑흑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겹창의 안쪽에서
나는 나를 지우고자 한다
가로수와 가로등의 사이처럼
좋은 사이를 유지한 채
멀어지고자 한다
여기저기서 자꾸 비가 내리고
나는 나랑 안녕 한다
이 소리는 자꾸 어디서 들리는가?
비 오는데 반복되는
메마른 얼굴은?
적적
어머니가 마늘을 찧는다
코가 아려서 조금 울었지만
붉은색 절구는 변함없이 붉기만 하고
따라서 코가 붉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
오늘은 다진 마늘로 뜨거운 찌개를 끓여야지
4인용 식탁에 세 사람이 둘러앉는다
동생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한 사람이 말을 꺼내려 한다
한 사람이 말을 아끼려 한다
한 사람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식탁 위의 사물은 차가워진다
한 사람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것,
우리는 그것이 구원이라고 믿는다
누군가 잘못된 발음으로 말문을 열자
동생이 돌아온다
어른의 모습이 되어서
2010년《현대문학》신인추천작 당선작_ 유계영/ 황인찬
곡예사 (외 4편)
유계영
이삿짐 속에서 늙은 의자가 넘어진다
전생의 재채기가 전생의 발가락이 한꺼번에 튀어나온다
의자는 다리보다 많은 발가락을 가졌었다
늙은 의자가 거리의 토마토 속에서 어린이를 골라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거리는 신발을 신지 않은 무리를 넘어뜨렸다
그들은 발바닥에 빛이 달라붙을 때까지 토마토를 던졌다
허공의 토마토를 전부 받아내기에 의자는
부드러운 피부를 가지지 못했다
이삿짐 속에서 세 개의 원반이 떠오른다
늙은 의자는 그중 하나가 반드시 모조품임을 안다
이미 죽은 적 있는 나무들과 사람들이 서로 기대며 걸어간다
늙은 의자의 발목이 부러진다
가능한 자세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래된 오렌지
1.
이곳의 문들은 어떤 퇴장도 기억하지 않는다
혀를 빼 무는 것과 보조개가 팬 붉은 뺨을 금지한다
격자무늬 커튼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행동을 금지한다
그러나 복도식 아파트를
몸을 생략하고 줄지어 않아 있기를 좋아한다
한밤중에 모일 것
타이어가 거꾸로 박힌 모래판 위로 달빛이 쏟아지듯이
오색만화경을 쓰고 튀어나올 것
입술 너머로 넘어진 말들이 거대한 바퀴가 되기까지의 모든 입술
2.
우리는 문밖에서만 이쁜 아이들
인사는 잘하고
맑은 날에는 유리창과 축구공을
흐린 날에는 우산과 목마름을 튀기며 몰려다녔지
복도식 자정을 박살내면서
유리창은 깨지기 전 아주 조금 휘어진다는 걸 알았지
재미를 위해서라면 오늘보다 먼 미래는 없다고 믿어
가끔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검은 뿔을 입고 나타나는 녀석들
못 말려 그들은
아침이 오면
우리가 훔친 물건들이 화단 가득 피어날 거다
3.
아파트 복도에 나란히 호랑이사자흑표범토끼, 토끼
누군가 유리창에 붉은 얼굴을 뭉개보고 있다 불빛, 불빛
휴일
몸에 딱 맞는 의자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친 남자의 날
완성했는데 초대장이 세 줄을 넘기지 못해 죽었고
의자의 구조를 못 견딘 못이 하나 튀어올라 박혔고
단 하나의 못이 튀어올랐을 뿐인데 몸에 무수한 못이 단숨에
남자의 죽음은 세 줄 이상의 이유가 없어
넘겼어?
못 넘겼어?
이목구비가 참 또렷하세요
웃는 무덤은 첨 봐요
몸에 딱 맞는 의자죠
생일과 기일이 일치하는
초대장이라면 난 못 받았을 거예요
흥미로운 소문은 주소가 필요 없죠
섰어?
앉았어?
의자들은 몸의 눈치를 너무 많이 살펴왔다 싶겠군요
때마침 집배원의 커다란 가방 속에서 순서 없이 흐트러지는, 엽서들
당신은 절대로 묻히지 않죠
무게 없는 형태로 앉아 있는 나무
잘 닫혀 있는
너도밤나무
뒤통수에 대고
우리 동네 놀이터에는
누구와도 나누기 싫은 사탕이 호주머니 속에서 녹고 있다
꽉 끼는 바지 입은 남자에
빨간색 물방울무늬 구두 신은 여자애
둘이서만 노는데 각각 세 시에 아홉 시에 자란다
사고치고 난 뒤 아파서 몰랐다 말하는 것은
녀석들이 재미있어하는 거짓말
절대로 맞힐 수 없는 수수께끼의 정답처럼
나는 매 순간 나를 흘린다
만질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도록 태어났다
(계절은 맞지 않는 모자를 쓰고 비틀)
나는 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이 나무를 거울이라 우겨도 좋겠지
아끼는 손거울이 깨지고 만 건
얼굴에 얼굴을
너무 가까이 대고 말한다고
파편들이 알아서 더 많은 얼굴을 흉내 낸다
우리 동네 놀이터에선 여자가
빨간색 물방울무늬를 흘리고 서 있다
바지 무릎 뒤에 접힌 주름의 개수만큼
여자는 남자에게 애칭을 붙여준 적이 있다
여자는 더 뚱뚱한 여자가 태어날 때까지
무궁무궁 자란다
참새들이 맴을 돌며 지긋지긋함에 대해 노래 부른다
아이들의 꾀병을 이해하는 건 나뿐
이건 누가 흘린 표정일까
죽은 쥐들의 뼈가 튼튼하게 쌓여 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나뭇가지가
바람을 꼭꼭 접어놓는다
달콤, 달콤 우리의
생략된 뒷장면
쥐
방 안의 불을 다 켜두었는데 어두워
나는 스케치북 오른쪽 가장자리에만
태양을 그리는 습관이 있지
아무리 닦아놓아도 저무는 창문
내일의 태양은 장롱 속에서 검은 상자를 뒤집어쓰고 있다
나의모자는 빛나는 모서리를 가졌네
투명해질 때까지
입 안에 든 젤리를 굴리며 밖을 살핀다
의자는
젖은 수건을 두른 어깨처럼 비어 있다 직사광선이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고 구부러진다 창밖의 아이들이 공깃돌의 뚜껑을 열고 모래를 채운다 그들의 허밍엔 ㅈ발음이 가장 흔하다 글쎄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더니
사라지지 않는 왼쪽 귀를 얻게 되었어
신발에 맞는 발을 고르러 나간 언니는
돌아오지 않고
의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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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외 4편)
황인찬
그는 내가 눈이 맑다고 했다 그는 내가 보호받고 있다고 말했다
저녁 다섯 시,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는 내 말을 듣기를 원했다 그는 내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내
가 행복해지기를, 그가 내 위안이 되길 원했다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할래요?"
그가 한 말이었다 그는 내게 좋은 곳에 가자고 했다 그는 내가 거
기서 더욱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나는 좋은 곳을 믿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저녁 다섯 시, 나는 돌아온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듀얼타임
그것은 함께 공원을 걸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중앙공원의 분수대 앞에 있었다
너는 센트럴파크의 분수대를 지나갔다
네가 한낮의 공원에 서 있으면
나는 어둠에 붙들리고
개를 데리고 나온 여자가 개를 놓쳤다
그러자 그곳에서 자전거가 쓰러진다
우리는 함께 공원을 걷고 있었다
여자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올 때
점점 짙어지는 어둠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무엇일까, 마주잡은 반쪽의 따뜻함은
갑자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내가 어둡다. 말하자
네가 It's dark. 말한다
개종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에 나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의 안쪽에는 나와 기원이 있었다
나는 기원을 바라보며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 물었다
기원은 내게 잘못된 일은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올 여름의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했다
아무런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흑과 적의 세계
합병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우리 아버지의 심장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검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검은 피는 검은 발을 만들고, 검은 손톱을 만들고, 검은 얼굴로 웃게 만든다
탁자 위에 놓인 심장이 거기서 개심한다
흑흑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겹창의 안쪽에서
나는 나를 지우고자 한다
가로수와 가로등의 사이처럼
좋은 사이를 유지한 채
멀어지고자 한다
여기저기서 자꾸 비가 내리고
나는 나랑 안녕 한다
이 소리는 자꾸 어디서 들리는가?
비 오는데 반복되는
메마른 얼굴은?
적적
어머니가 마늘을 찧는다
코가 아려서 조금 울었지만
붉은색 절구는 변함없이 붉기만 하고
따라서 코가 붉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
오늘은 다진 마늘로 뜨거운 찌개를 끓여야지
4인용 식탁에 세 사람이 둘러앉는다
동생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한 사람이 말을 꺼내려 한다
한 사람이 말을 아끼려 한다
한 사람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식탁 위의 사물은 차가워진다
한 사람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것,
우리는 그것이 구원이라고 믿는다
누군가 잘못된 발음으로 말문을 열자
동생이 돌아온다
어른의 모습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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