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022 432

난향

"> 난향 蘭香 /인보/ 2022.11.1 허투루 대접했다간 단칼에 제압당할 얼비친 수작 말라 날카로운 눈매 수정 같은 눈알엔 총기만 가득하다 허튼수작 말라 오차 없는 잣대로 제압당하고 보면 상좌에 모실 품성을 알겠다 하늘의 기를 이어 푸르게 뻗는 기질엔 그윽한 향이 있어 매혹한다 갓 피는 처녀의 몸매에서 풍기는 향에 비교하랴 매서운 서릿발로 내리덮어도 청초한 푸른 절개는 비수 앞에 꺾이지 않는다 속물들 난의 속성 알아차려 난향이 얼마나 고결한지 알라 *화려하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자작글-022 2022.11.01

호박꽃

호박꽃/ 인보/2022.10.30호박꽃도 꽃이라비웃는 수컷들아네 각시투구꽃*도꽃같이 보이더냐색에 홀리면 눈꺼풀에콩깍지 씐운다고내겐 호박벌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건 알기나 하나꽃 반열 있으면서송장 썩는 냄새 풍기는리플레시야 Rafflesia는파리나 딱정벌레가천생연분이 있다는 걸 알면꽃 보고 비웃다간 꽃망울 피기 전에 목 떨어진다* 사약 재료 쓰는 맹독성 꽃

자작글-022 2022.10.30

꽃의 행로

꽃의 행로 /인보/ 2022.10.29 노인은 꽃의 행로를 지나도 한참 지나 꽃의 향기에 매혹하면 노망이라 눈 곱지 않은 시선의 몰매를 맞는다 금방 활짝 한 꽃이 지린내를 싫어하고도 남지 유유상종은 이럴 때 쓰는 말 꽃은 같은 종류 꽃향기는 마음 두지 않는다 다른 꽃에 관심이 끌린다 노인은 젊다 예쁘다 곱다는 구별할 줄 알고 엉큼한 생각은 노망이 외부를 어지럽게 한다 다만 마음속에서 느낌은 팔팔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길에서 만난 예쁜 꽃을 보고 자기를 한탄 말라 꽃 같은 행로는 겪었으니 앞날 꽃길을 마음 빌어주라 꽃의 행로는 각기 다르다 마지막 맨몸으로 꽃향기 품었다면 호상에 꽃향기 가득할 것이다

자작글-022 2022.10.29

봄의 꼬리 길면 밟힌다

봄의 꼬리 길면 밟힌다/인보/ 2022.10.29 몰래 봄여름 가을 겨울 여러 번 외쳐도 아무 탈 없이 넘어간다 너무 오랫동안 외치다 그만 바로 이웃에 들켰다 개구리는 경칩만 되면 일어나라는 신호가 배꼽 아래부터 전달한다 봄이 일찍 도착한 개구리는 만끽하지 나의 봄은 꽃피던 개구리가 날뛰던 새가 울던 무심했던 봄 올해는 다른 감각으로 계절을 느낀다 아름다운 꽃을 쓰다듬어 주라는 충동 무심한 혓바닥은 무감이 아니라 꽃의 향기에 민감해진다 가까이 오는 봄꽃을 향기 밀어내는 목석이 아니거든 매일 맞고 달다 달콤하다 너무 오래 향기에 젖어 내 입술에서 새어 나간다 신기한 가상공간을 타고 이쯤 되면 밟히지 않을 수 없지 도막 난 향기는 끝낼 말 그간 향에 취했다고

자작글-022 2022.10.29

추사체

추사체/인보/ 2022.10.28 강직한 성격처럼 한겨울 추위를 몸에 두르고 덜덜 떨면서 아닌 척 꼿꼿한 자세로 붓을 잡는다 추사체로 쓴 歲寒 베인 묵향 하늘 치솟고 백로 한 마리 창공을 선회하다 추운 바람 맞아 얼지언정 한사코 푸름만을 움켜쥔 소나무에 앉는다 부들부들 떨면서 밖을 걸을 수 있어도 추사체의 몸자세 또는 운필은 가당찮다 내 허방을 비워낸다는 것 쉽지 않아 그 언저리만 배회한다 갈고 닦고 진한 먹물 묵향으로 그윽해 허튼 생각을 비워낼 때 추사체는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진한 묵향이 찬 공기를 제압하리라

자작글-022 2022.10.28

택시 요금 계기판

택시 요금 계기판/인보/ 2022.10.28 모처럼 택시를 탔다 내 눈은 미터기만 정신 팔려 운전석을 샅샅이 훑는다 어! 이 택시 미터기 없네 난감한 것은 운전기사가 아닌 내가 더 낭패당한 얼굴이다 모든 정보를 입력하고 앞에 다가올 일을 상상의 골짜기는 싸늘하기만 하다 바깥 풍경은 나처럼 근심에 놀아 아무도 말하지 않고 꼼짝 않는다 드디어 목적지 00000원입니다 미터기는 기사 옆 아래에 있었다 남을 의심한 죄 그간의 안녕은 사라지고 근심만 놀았지 미터기 없는 택시로 영업하겠나 사막에도 눈이 내릴 수 있겠다는 엉뚱하게 생각한 나는 폭삭 얼어붙었다

자작글-022 2022.10.28

가을

가을/인보/ 2022.10.28 여름의 악한들이 우르르 이 골목 저 골목,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며 더운 기운으로 윽박지른다 아무도 타이르거나 타협하지 않아 땀만 흘리는 동안 에어컨 계기는 싸늘하게 돌아간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지구는 돈다 봄을 쫓던 배추흰나비는 여름과는 타협하지 않겠다고 무 장다리꽃만 찾아든다 개구리는 물을 박차고 나무 그늘을 파고들고 그 사이 여름의 불한당은 하나둘씩 이탈하자 기를 잃어간다 땀 뻘뻘 흘린 보람으로 사과는 술 취해 벌겋게 달아 있고 감은 무안당하고 대추는 땀 독에 절여 빨강 망토를 쓰고 가을을 즐긴다 여름의 불한당에 시달린 생명들이 보상이라도 받은 듯 붉거나 제 색깔에서 탈출해 가을을 마중하려 모두 색 띤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작글-022 2022.10.28

늦잠의 맛

늦잠의 맛/인보 / 2022.10.26 내 수면의 긴장은 주 단위로 온다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 밤까지 팽팽한 고무줄 퉁기면 ㄱ, ㄴ, ㅏ, ㅓ, 등의 음 값이 울린다 상투어 같은 어절 젊은 오지 않는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 어절의 적용은 편한 화요일 밤부터다 내 시계추는 한여름 황소 같다 오전 10시까지 밤으로 연장한 늦바람 피워 달콤한 여인을 끌어안은 늦잠의 맛

자작글-022 2022.10.27

구멍이 선할 때

구멍이 선할 때 /인보/ 2022.10.26 사람은 저마다 많은 구멍을 갖는다 구멍은 선한 바람과 나쁜 바람이 드나든다 선한 구멍이 더 많으면 악한 구멍을 짓눌려 외모는 선한 사람으로 행동한다 나무에 딱따구리 구멍 하나쯤은 푸른 잎을 잃지 않아 어제나 창창하다 딱따구리를 품는 일은 산을 즐겁게 하는 일 내 몸에 구멍은 좋은 공기만 드나들도록 벽에 난 못 자국처럼 여기거나 몸 한곳 내어주어 못이 편안히 자기 일하도록 한다 구멍이 상처가 되어 실망하거나 길이 되어 행운이 일어나는 일은 몸을 닦아낼 마음에 달렸다 선한 구멍이 많아지도록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작글-022 202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