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023 417

처음

처음 /호당/ 2023.12.19 좀 늦은 나이에 입대한 나 처음 부대 배치 받고 첫날밤 내무반 불침번 보초를 명한다 새내기를 믿고 잘 자는 선임자들 연병장에서 선착순 엎드려뻗쳐 원산폭격 이런 과격한 체형이 닥칠 내일을 걱정 말고 잘 자라 신병 6명이 교대로 불침번 서고 두고 온 애인은 이맘때 달콤한 꿈을 꿀까? 나처럼 명상에 잠길까 이윽고 새날이 밝았다 선임하사의 호출 간밤 신병 불침번은 어떻게 했기에 내 지갑이 사라졌다 날벼락 같은 도둑으로 몰다니 한 명씩 대면하며 다그친다 신병 첫날밤이 범인으로 취급받는다 드디어 연병장에서 엎드려뻗쳐 자수하라 말이 없다 원산폭격, 선착순, 뺑뺑이 돌기, 요것 보라 실토하라는데 이번에는 야구 배트로 마구 갈긴다 궁둥이가 으스러지는 듯하다 신병 첫날은 너무 가혹하다 무..

자작글-023 2023.12.19

전압

전압 2023/호당/2023.12.19 결혼 초기야 전압이 넘쳐 매일 퓨즈를 갈아 끼워야 했다 단 한 번 스파크는 한이 차지 않아 건전지를 꼬드겨 여러 번 불티를 날렸다 밖으로 나가면 피둥피둥한 건전지는 불꽃이 그리워 애교 부리거나 배배 꼬여 드는 것이 아닌가 시간은 무심하지 않아 꼬리가 길면 밟힌다 그날 밤 건전지에 접속하려 들자 스위치를 내리고 저항한다 달래듯 무릎 꿇고 손바닥 싹싹 빌지만 퓨즈마저 끊어버리고 이건 과부하도 아니다 전압은 가끔 폭발하듯 세지자 트랜스에 꽂아 전압을 50볼트 그보다 더 30볼트로 하강해 버리자 무릎 꿇고 과오를 빈다 함부로 전압이 높다 하여 어디든지 꽂으려 하는 못된 성깔은 늙어서 어떤 대접받은 지

자작글-023 2023.12.19

디지털시대

디지털 digital 시대/호당/ 2023.12.17 시대에 뒤진 아날로그 analogue 적인 사고로 쓴 내 詩 시다운 시 한 편 있겠나 自愧한다 내 시의 어휘는 군더더기가 많다 이해 해주지 못할까 봐 토씨(助詞) 어찌씨(副詞)를 많이 포개 태엽을 감아 놓는다 디지털 시대의 문장은 축약 縮約이다 가지 몽땅 베어버리고는 몸통만 보여 주어도 금방 우거진 가지에 열매 주렁주렁 AI*지능은 형상화한다 한발 뒤진 내 문장은 나 같은 아날로그식 생각으로 쉽게 알아차리지 디지털 시대의 AI는 피식 웃을 내 시 한 편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자작글-023 2023.12.17

앞장서기

앞장서기/호당/2023.12.164명의 마음이 꼭짓점에서 만나면함께 녹아 통한다시발점은 반월당 만남의 광장여긴 무위 고에 익숙한 주름살들만나려 기다리는 이가 있어 살맛 난다넷 변이 어우르면 사각형이 되어어느 각이 앞장서면 따라간다 그것이 물 흐르는 방향이다팀파니 2호점은 매일 바글거리는 입술들진 맛에, 자작 음에, 껄떡거리는 침샘에구개음에 뒤범벅이 되어 시끄럽다마지막 마무리 커피앞장서는 이를 따라가면 미도다방남의 애인을 침 꿀컥하는 사이거피는 사라진다이때 사각형은 원이 되어 구른다앞장은 언제나 구미를 끌어내는 문장이다

자작글-023 2023.12.16

모호한 시그널

모호한 시그널/호당/ 2023.12.16티셔츠와 브래지어가 교차하는 사이애매한 바람이 드나든다브래지어의 눈에서도 수 높은 색광이 비춘다애써 외면하려는 모호한 시그널은도수만 높이게 한다파랑은 일고 물자라 소금쟁이 물맴이 물방개들이 모여 물장구치기 놀이판에 뛰어들어골바람 날린다함께한 식탁 커피 물장구 놀이는애매한 시그널이다도리어 바람개비만 잘 돌게 한다바람이 사라지자 브래지어는 묵상 중모호한 시그널엔 불순물이 없다는 것을알게 되자 너도나도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다

자작글-023 2023.12.16

방백

방백 傍白/호당/ 2023.12.15 능청스럽게 잘 닦은 도로 같은 대사를 줄줄이 읊어 내는군 능청꾸러기들 그 홀을 들먹거리는데 그걸 못 듣는다고 사내 연애는 방백처럼 시치미 떼고 마주치면 깍듯이 맞절하고 뒤로는 호박씨 까고 방백 같은 못 들은 척 시치미 떼기 들은 자는 바보처럼 좋아 손뼉 치고 *관객에는 들리지만 다른 배우들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약속하고 읊는 대사

자작글-023 2023.12.15

겨울비

겨울비/호당/ 2023.12.15 한겨울이 조금 느슨한 맘 깔리면 눈 대신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종일 *대프리카도 이번은 넘어가지 않아 목말라하던 대지는 느긋해진다 월요일은 문맹자와 어울리는 날 주차는 맘 졸이는 대목을 공간이 나를 반긴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대지에 쌓인 대기오염이 싹 씻겨버린다 목욕한 뒤끝 산뜻한 낯빛으로 반긴다 겨울비는 뒤끝이 깨끗하다 *대구는 덥고 비는 잘 오지 않는다는 아프리카에 비유한 말

자작글-023 2023.12.15

방학

방학/호당/ 2023.12.14 배움이 있는 곳엔 방학이 있다 그곳 마른 버들 움 틔워 버들피리 불어 즐기게 하는 일이 내 일이다 모음 자음에 조금 물올라 잎 피우고 있는데 방학했으니 각기 집에서 콩나물시루에 물주고 있겠지 추운 날씨 때문에 모음 자음의 문장들이 얼어 흐릿해질까 노파심이다 물 올리기 힘들어 온몸에 피톨이 맥박처럼 뛰기를 바라는 내 일을 잠시 놓는 방학 즐겨도 마음 편치 않다

자작글-023 2023.12.14

에메랄드그린

에메랄드그린 emerald green/호당/ 2023.12.14 한 1년 사이 훌쩍 자란 너 하늘만 바라보고 앞뒤는 왜 바라보지 않나 골고루 바라보면 세상의 변화는 알아차릴 텐데 하늘만 향하는 너는 편애의 기질이 있는가 봐 푸르고 늘씬한 몸매는 분명 한 곳만 사랑하지 않았겠나 골고루 바라볼 때 그때야 너를 칭찬한다 에메랄드* 기질에 마음마저 푸르면 내가 너를 안아주고싶다 *emerald: 크로뮴을 함유하여 비취색을 띤 투명하고 아름다운 녹주석

자작글-023 2023.12.14

트럭

트럭 /호당/ 2023.12.12 팔거천 동로 양 기슭 트럭들이 잠자고 있다 깊이 잠겨 충전 중 내일 활발히 굴러 신나게 일한다 인간은 심장만 두고 몸체는 쉰다 모터는 쉬지 않으면 펄펄 끓는 머리를 앓는다 나는 매일 쉰다 할 일 없는 무위고가 쉬는 것이 일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위고는 사라진다 팔거천 동로 양변 트럭은 무거운 짐 자고 또는 빈 짐으로 잠자고 있다 충전하고 있다 덩달아 벚나무도 잠들어있다

자작글-023 2023.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