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022 432

큐브

큐브/인보/ 2022.9.25 그 많은 면의 마음이 뭉쳐있다 이걸 들고 회전하거나 비틀어 한 마음이 될 때 깔깔거리는 장면을 보면 행운이 온단다 이 뭉치를 처음 대하는 여인처럼 서툰 언어로 떨리는 가슴 짓누르고 비틀어 마음을 떠본다 그녀의 낯빛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나를 조소하는 듯 혀를 날름거린다 너와 나는 한 테이블에 마주하여 대화는 늘 엇박자로 교묘히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나는 그때마다 이리 틀고 저리 틀어도 태연한 듯 받아넘겨 색깔을 달리한다 나는 익지 않은 살구를 내 것인 양 따려 하고 그녀는 빛 좋은 개살구로 나를 실험하듯 낯빛 좋게 대한다 아무리 좋게 보여도 일제히 같은 색깔로 깔깔 웃기는 틀렸다 처음 맞는 큐브를 비트는 짓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여인을 맞나 내 애인으로 만들려는 허튼수작이다

자작글-022 2022.09.25

서울 물

서울 물/인보/ 2022.9.25 군대 훈련병은 처음이란 말이 공통어다 꼬마들 재재 소리 베인 물을 마신 지 2년 다른 물맛은 훈련병일 때 서로 섞여 물맛을 잃는다 약은 서울 물 마신 대학생이 약사 빠르다 훈련 8주를 7주 때 한 소대를 같이 지냈으니 슬슬 촌놈 물에 다가와서 살살 치켜세우니 콩나물은 으쓱으쓱해진다 7주째 애인이 면회 올 테니 돈을 빌려달란다 나를 인정하고 치켜세우니 그가 쥐틀을 두었다는 것을 눈치 못 챈 내가 덜컥 승낙하자 철썩 문은 잠겨졌다 살살 구실을 대고 안심시킨다 7주 때 애인이 꼭 면회 한번 온다고 약속이 한주 물러졌으니 안심하란다 8주 끝 날을 짐 싸기 바쁘고 연병장에서 마지막 훈련 노고를 위로하는 연대장의 말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끝나자 사방팔방 해어졌다 역시 서울 물은 약..

자작글-022 2022.09.25

어처구니

어처구니/인보/ 2022.9.23 어처구니도 자기 몫이 있다 맷돌에 이것 없으면 난감할 때가 있다 어처구니 있기 때문에 일이 풀린다 맷돌이 자기 몸을 내어주어 찰싹 붙어 수작하면 원을 그리면서 일을 쉽게 이룬다 소나무 뿌리가 돌 틈을 내리뻗어 창창하게 하늘 향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다 맷돌은 자기 몸과 섞어 어처구니와 합작해야지 이걸 거부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자작글-022 2022.09.23

지하단칸방

지하 단칸방/인보/ 2022.9.21 지하 단칸방은 내 형편이 딱 알맞다 엷은 창호지 한 장으로 나는 천장으로 너는 방바닥으로 한다 그 흔한 음향 바스락바스락 흡착 흡착 아랫도리가 불끈 치솟아 달콤한 아이스크림쯤으로 생각을 바꾸니 편하다 이만한 일들은 각오하는 게 좋다 젊음의 기가 내려앉으면 좋겠다 미세한 진동이 그냥 스치지 않는다 에로스 한 진동은 삶의 연속에서 필수 코스임을 치부해야 한다 나의 고독은 지하 단간방에 가득하다 이걸 뿌리치려 낮은 도서관에서 씨름 밤은 내 삶의 외곽인 천정에서 음습 탈출은 빨대 꽂을 우물이다

자작글-022 2022.09.21

시클라멘이 대를 잇는다

시클라멘이 대를 잇는다/인보/ 2022.9.21 작년 늦가을 꽃집에 들르니 일제히 처녀들이 우르르 시선을 준다 그 많은 처녀 중 가장 화려하고 눈망울 반들반들해 덥석 안았다 내 베란다에서 요염한 풍채를 풍겨 나를 사로잡는다 그만큼 내 사랑은 듬뿍 뿌렸더니 긴 꼬리 끝에 씨앗을 맺는다 그럴수록 내 주위는 더 환해져 사랑을 듬뿍듬뿍 내린다 생물은 대를 잇는다 산고의 고통과 심약해짐을 알고 휴식이 필요하다 휴면기로 밀어 넣고 재활을 기대한다 까맣게 잊은 지 몇 달 드디어 새파란 눈알을 밀어 올린다 요람에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애면글면 마음 쏟는다

자작글-022 2022.09.21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인보/ 2022.9.21 그 얼음판에 들어서면 가슴이 꽁꽁 아니 두근두근하다 결국 빙판에 구멍 하나 정 조준해 낚시를 드리운다 빙어 하나 낚아 올릴지 서로 마주한 가슴엔 불꽃을 주고받는다 냉정한 자세다 올 테면 와라 덥석 안겨 주리라 흥 나도 얼었다 얼음구멍으로 내 심장을 꿰뚫는 기분으로 낚시를 드리울 테다 우선 정 조준하는 중 좌측 우측 뒤쪽으로 바람이 훼방 놓는다 이것부터 처지하고 너를 향한다 내 떡밥 한 덩이 내리꽂으면 어쩔 텐데 올 테면 와라 그까짓 떡밥 묵사발로 받아 치우겠다 빗금이든 직구든 포물선이든 어떤 방식이든 긴장은 마찬가지 준비는 단단하다 얼음판 같은 살기를 ‘스트라이크’ 산청 어는 하늘 높이 난다

자작글-022 2022.09.21

겨울 강

겨울 강/인보/ 2022.9.21 얼음판으로 단단히 굳은 강 내 강인한 모습을 누가 흠집 내려 돌팔매질하는가 쩌렁쩌렁 소리로 호령이 산꼭대기까지 닿는다 모진 세월 버텨나가려는 내 정신은 바깥으로 얼음처럼 굳어진다 겉으로 굳었지만 안으로 유한 본성이 흐른다 그건 얼음장 밑으로 물은 흐르고 고기는 꼬리 친다 밖으로 목화송이 터트리려 햇볕 끌어모은다 속으로 단단한 목화씨는 내년을 바라본다

자작글-022 2022.09.21

모른 척

모른 척/인보/ 2022.9.20 세월을 단맛 쓴맛 모두 겪은 나이 때로는 모른 척이 늙은 대접보다 끼어들었다 봉변당할 때가 더 많다 백수 앞에 담배 연기 뿜어 훑거나 나쁜 짓을 보고도 모른 척은 어깨 처진 수탉 암탉 앞에 고개 숙인 꼴이다 윤리의 잣대를 아무 곳이나 재려 들지 말라 모른 척은 잣대가 부러진 것 아니다 다만 자기 갈 길을 찾아 뒹굴다 자루 포대 쓸어 담길 뿐이다 비위 보고 수탉 목청 높게 울지 못하는 세태를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저 그러려니 좋은 게 좋다는 명제로 넘길 뿐이다

자작글-022 2022.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