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024 287

떨어지다

떨어지다/호당/ 2024.2.22 내 재주가 남보다 떨어진다는 생각 떨군 적 없다 아닌걸 대입 시험장 입구부터 벌벌 떤다 답안지는 떨린 손으로 떨린 문자로 떨린 답안지를 내밀었다 결국 떨어지고 부모님 걱정이 떨어지고 떨어진 것을 가슴에 담았다 떨어진 것은 허수가 아닌 내게는 실수 實數였다 이걸 익히도록 밤낮으로 책장 넘겼다 검정고시는 마음 독한 자의 고행길을 완주 끝에 붉은 열매 익혀 합격통지서 한 장 떨어져 가슴에 찰싹 붙었다

자작글-024 2024.02.22

늦깎이들

늦깎이들/호당/ 2024.2.20 문자 해독의 길은 어둑한 그믐밤 낯선 곳처럼 어리둥절하다 호랑이 담배 피웠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던 무지의 밭고랑만 긁어 댈 때 먹고 사는데 만 버둥거렸다 호랑이 담배 피웠다는 이야기를 알아차릴 때 세상은 번쩍번쩍 보릿고개는 유머로 회자하고 연필 들고 호미질하듯 그어대자 그건 모음“ㅣ”자라 한다 호미 눕혀 좍좍 긁어대니 지우개를 쓰세요 낯선 땅이 고향처럼 친숙해진다 모음 자음이 눈에서 머리로 옮겨간다

자작글-024 2024.02.20

상투어-클리셰-cliche

상투어-(클리셰)-cliche /호당 2024,2,18 밥 먹고 똥싸고 잠자고 오늘도 내일도 삶이 클리셰처럼 현현한다 이건 강 하구의 담수 淡水 같다 가끔 안부를 물으면 그럭저럭 지낸다는 말 애매모호한 은유처럼 들린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황금 물결치는 들판 이런 상투어가 활력이 넘쳐 생동했으면 좋겠다 들판을 뛰는 망아지가 저녁노을에 젖어 뒷걸음질하는 페리디 parody를 연출하고 나는 껄껄거린다

자작글-024 2024.02.18

주목 朱木

주목 朱木/호당/ 2024.2.18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버티는 주목이 고사목 경지에서 만난다 반송처럼 사랑받을 때가 어제 같은데 노송과 고사목의 이분법으로 갈라지는 또래 찾아 앉았다 역시 맞아 주는 늙은 주목의 향기는 치마폭이 휘감길 때 콧구멍 벌름벌름 약차 한 잔 앞에 늙은 혓바닥소리가 정다워진다 내 향기보다 바깥 향기 마셔 천년을 버티려 한다 눈알이 반들반들 귀청이 청청 입맛이 쩍쩍 이만하면 버티고말고

자작글-024 2024.02.18

에누리

i 에누리/호당/ 2024.2.17 노점상은 헌 상자를 조각내어 값을 써놓는다 정찰 표다 더는 에누리 수작은 쩨쩨한 사람 서문시장 가방가게는 각종 가방이 북어 덕장같다 스마트폰이랑 자질구레한 것 넣자는 생각 얼굴 흘끔 보고 생각보다 높게 호가한다 에누리는 반을 꺾어 후리쳤다 펄쩍 뛴다 그럼 5,000원을 에누리 반색한다 현찰로 마무리하니 환한 낯빛 필요가 충족하면 내 에누리는 적정한 선이다

자작글-024 2024.02.17

셰이커 족속이 될 때

셰이커 shaker 족속이 될 때/호당/ 2024.2.16 남자가 숫기를 뿜어 펼칠 때가 가장 아름답다 웬걸 낯선 공간에서 셰이커 족속이 되는 날 숫기는 오그라져 졸장부가 된다 도장에서 첫술에 취하나 한 병 두 병 열병 스무 병 소주병을 비울 때야 숫기는 불쑥 돋아난다 하늘엔 별이 총총 흐르고 냇물에 고기떼처럼 셰이커 족속이 되면 울컥 솟는 용기는 불끈 치솟는 아침 햇살이 짙은 운무를 꿰뚫는 서광을 뿜는다 겉핥기가 아닌 마음마저 꿰는 음률에 처음 맞닥뜨린 전선에서 스파크는 번쩍번쩍 함께한 별이 뱅글뱅글 돌지라도 길흉사에 명함 하나 올릴 수 없는 셰이커 족속들

자작글-024 2024.02.16

헨들을 놓다

헨들을 놓다/호당/ 2024.2.10 근 30여 년을 운전한 나 그간 행복했다 고요한 바다만 운행할 수만 있겠나 폭풍과 큰 파고는 시련으로 생각한다 늦게까지 헨들 잡은 나 내자와의 호사다 마음먹은 데로 함께 가는 곳마다 꽃을 피워 향기를 즐겼다 불쑥 운전 그만하시라고 퉁명스러운 음파가 귀청을 친다 몇 분 후 키이 주세요 남의 차 몰고 사고치고 거들먹거렸는데 갑자기 뒤통수 맞은 듯 설날 떡국 그릇 깨어진 듯 어이없어 묵묵부답 반환했다 내 몸 어는 부분 잃은 기분에 행복 하나 떠났다 올해 말로 면허 시한 나도 생각 중인데 잘 부리고 섭섭한 뒤쪽이 캄캄하다

자작글-024 2024.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