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022 432

과도

과도/호당/ 2022.3.14 과도는 주로 과일 깎는 데 쓴다 사과 복숭아는 관습적으로 껍질을 깎는다 조금 흠 있는 사과 흠만 도려내면 하얀 속살로 본성을 드러내 사근사근 단물로 대접한다 나는 얼마나 도려내면 내 속 진수를 들어낼까 과도는 수도원이다 베어내고 깎아 내고 예리하게 박피는 수도 행위다 내 허방을 없애 주는 과도는 내 맘속에 있다 과도를 끌어내라

자작글-022 2022.03.14

소용돌이

소용돌이/호당/ 2022.3.12 삶은 훈풍만 맞거나 평탄한 강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다 먼 길 돌다 여기까지 와서 소용돌이 맴돌다 서로 마주한 얼굴들 바람은 끊임없이 뱅글뱅글 강물은 소용돌이를 빙글빙글 돌면 섞이고 돌면 녹아나고 바람으로 돌거나 소용돌이로 돌거나 도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바람은 맴돌다 보면 자기 힘에 소멸하고 나서 동력을 잃는다 물은 소용돌이를 헤쳐 나오면 솨솨 더 큰 강물로 흐른다 소용돌이에서 만난 바람의 얼굴은 소멸하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강물은 바다로 닿을 때까지 소용돌이에서 만난 얼굴 잊을까

자작글-022 2022.03.12

유학산

유학산/호당/ 2022.3,11 치열한 총질 삶과 죽음의 소리 살아지자 세월이 약이라 창창 푸르러 기억하랴 자유민주공화국 인민민주공화국을 번갈아 세웠다 사라졌다 세웠다 사라졌다 세웠다 이상 끝냈으니 살아 푸르다 서로 총구 들어대고 너 죽고 나 죽고, 너 죽고 나 살고 너 살고 나 살고, 남는 것 뼛골 지하에서만 한데 어울려 언제 그런 짓 했냐고 모른 채 영민하소서 낙동강 물 그제나 지금이나 무심히 흐른다 주:유학산은 파공산 줄기에 해발839 고지. 6.25의 격전지 낙동강 최후방어선

자작글-022 2022.03.11

숙성한 김치

숙성한 김치/호당/ 2022.3.10 잘 익은 김치는 보기만 해도 군침 돈다 가느다란 세파는 대파가 되어 파 뿌리처럼 늙어버렸다 셋방 한 간 소꿉놀이 같은 살림살이에 없는 것이 더 많아 추웠지 월급이라는 것 장마 때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둘 세월이 쌓이면 물 한 방울도 불어나지 내 가슴에 봉지 씌워 풋복숭아는 백도처럼 단물로 차고 풋김치는 홍시처럼 익어갔지 욕심부리지 않으면 부족한 게 없어지고 넉넉한 반찬 밥 한 그릇 뚝딱 숙성한 김치 맛과 향기로 고명 얹은 사랑으로 파 뿌리는 김치 향에 잠겨 톡 쏘는 매운맛이 단맛이 된다

자작글-022 2022.03.10

얼굴들

얼굴들 /호당/ 2022.3.9 왁자지껄한 골목에서 그냥 스쳐 간 얼굴이 아닌 바엔 코로나 정국일지라도 *잊히기 싫은 얼굴이다 내가 너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병상에 누워 산들 걱정해 주지 않은 얼굴이 같은 봉우리에서 살아가는 고목일지라도 그냥 남이 되기 싫은 얼굴이다 담을 쌓은 듯 쌓지 않은 바람에 구름에 쌓여 날아갈지라도 다만 보고 싶은 얼굴이 남이 되기 싫은 마당 가에 살아가는 감나무 같은 얼굴들 *박인환 얼굴에서 차용

자작글-022 2022.03.08

차단기

차단기/호당/ 2022.3.8 홈플러스에 차단기를 설치했다 이 지역 상권을 거머쥐고 있어 송사리는 얕은 물에 겨우 숨 쉬고 종전까지 무임 주차로 권력의 손에서 편리 하나 누렸는데 웬 차단기가 번쩍 손들고 어서 오십시오 한다 반찬거리 생활용품 몇 점 분수를 차리고 어쩌다 앞장서게 되어 출구에서 차단기가 칼자루처럼 번쩍 6,000원 내란다 북어쾌 꿰인 차들 빵빵 멋 하는거야 카드로 현금으로 치르면 될 걸 재촉한다 어쩔 줄 몰라 정신이 혼미해진다 겨우 면허번호로 차단기를 벗어났다 이런 짓 안 해도 권력을 누릴 텐데 혹시 권력에 누수가 생기는가

자작글-022 2022.03.08

동안거

동안거/호당/ 2022.3.8변형한 코로나바이러스는 창궐 중동안거처럼 서재에서 붙박이 하겠다그러는 동안 먼지 묻은 시집도 털어내고 밑줄도 치고 마음에 괴인 시어도 끌어내어 시 한 편으로 거풍하자살을 에는 찬바람에 거리는 사람들뜸하고 새들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제 나름대로 참선 중인가 봐나는 아랫목 차지하고 TV 리모컨을 조절하거나 트로트 가수 따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거나 코미디 나오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껄껄 웃는다이게 동안거냐고 아내의 죽비가 따갑다바깥 대숲에서 서걱서걱 소리에 내 허튼 마음이 뭉턱 베어나간다머리는 TV 화면으로 아내의 맛있는 음식 냄새로 꽉 채워졌다 때마침 꾀어내는 전화벨 소리 잇단다 동안거 중이라니, 미친놈, 나와내자의 죽비가 따갑다동안거는 아무나 하나

자작글-022 2022.03.08

골짜기의 물

골짜기의 물/호당/ 2022.3.7 끊임없이 흐르는 골짜기의 물에 양 기슭 숲은 항상 염탐한다 까투리는 수수한 차림 장끼는 화려한 차림이 예사로 보이지 않은 것은 장미를 보고 침 흘리는 수벌들 어깨 떡 펼쳐 마음잡으려는 것과 다르랴 참새는 작아도 새끼를 기르고 길가의 풀꽃은 짓밟히고 비틀려도 꽃피워 대를 잇는다 코끼리가 호랑이에 쫓겨도 새끼 두고 도망가더냐 웅녀는 위대해 골짜기의 물은 언제나 흘러 대지를 적신다

자작글-022 2022.03.07

강물

강물 /호당/ 2022.3.6 계곡을 지난 강물은 바다 이르러 자기완성을 파도로 알린다 긴 여로 논밭들을 적서 찬사 받아 우쭐하기도 오줌똥 폐수 덮어쓰고 좋다 싫다 안 했다 낭떠러지에서 새하얀 얼굴로 처박히면 해님이 안쓰러워 무지개 빛깔로 응원하면 더 신나 쏴쏴 좌우 볼기 맞아 내 몸 부서져도 탓하랴 강에 이를 때까지 폐수도 안아 한 몸으로 조용히 마지막 몸 추슬러 강물은 바다에 스며들면서 나는 완성한다 파도는 나를 안아 반기다 한 몸이 된다

자작글-022 2022.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