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021 496

길들인다

길들인다/호당. 2021.6.5 코로나 정국에 놓인 나 어디로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방향감이 분명치 않은 넓은 공간은 수많은 길이 있다 짐승도 밟지 않은 길로 간다 갑자기 멈춰 우뚝 선 나 허수아비처럼 아무렇지 않게 시끌벅적 시골 장은 뒤로하고 침묵만 쌓인 나 혼자만의 길로 시어가 깔린 그 길을 즐길 울창한 고독의 숲에 쌓여 새소리 바람 소리 친구삼아 나 혼자만이 익숙한 채 공동체 共同體 이전으로 길들인다 시작 노트: 늙음에 따라 길들어야 할 고독

자작글-021 2021.06.05

멧돼지

멧돼지/호당 . 2021.6.3 세상에서 먹지 않은 동물은 없지 울창한 산속이 내 삶의 터전 생명을 이을 젓줄이 있다 굳이 논밭을 훑거나 두근거리는 가슴안고 도시를 내려 갈 마음은 없다 누가 우리 젓줄에 빨대를 꽂았나 온산이 밤 도토리 열매 뿌리 지천으로 깔려있을 때야 남의 영역을 넘보지 않았다 대담해야 한다 사흘 굶으면 논밭을 뒤져야한다 이건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더 용감해야 한다 도시로 내려가 골목을 누비다가 기름진 먹이 뒤처리는 내 몫이다 공생할 수 없니

자작글-021 2021.06.03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호당 . 2021.6.3 6월 장마는 시작하지 않았다 비는 추적추적 옷 젖기 알맞은 심술궂은 빗줄기 젊은이 늙은이 함께해도 나와 연결고리가 없었으니 아무도 없다 처마 낙수는 제 갈 길 찾아 떠나지만 내 갈 길은 발 닿는 데로 떠난다 낙수 소리에 마음이 기우뚱 시야에 놓인 물상이 흐릿하다 이건 공허한 마음의 독소다 가장 정숙하고 고요한 집 고생대에서 현대까지 쌓인 도서관에 내 동공 洞空을 채우려 했더니 재채기가 먼저 와서 초를 쳤다 코로나 정국에서 왁자지껄 푸짐하게 마음 내려놓을 수 있나 각기 방 안에서 자기만의 소리로 메아리 없는 허공을 찔러본다 내 말과 엮을 우산 살대가 없으니 아무도 없다

자작글-021 2021.06.03

석이버섯

석이버섯 /호당. 2021.6.2 악산 바위벽에 발붙인 석이버섯 꿈꾸다 깨어나 활짝 핀 질긴 생명 꼬불꼬불 맴돈 나이테가 숨어있다 어둠 깔린 객석에서 눈 크게 뜨면 그믐밤처럼 어스름한 넓은 들판에 백 년 살 고목에 겨우살이가 보이고 장딴지 뚜껑 열면 곰삭은 된장 냄새 말굽 소리 들릴 듯한 말굽버섯이 항암은 내게 맡기라는 큰소리친다 세월을 문 닫는 깔딱 소리 들린다 내 문은 활짝 열어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나도 몰라 석이버섯은 자꾸만 *허성이 들리는데 청진기에 비 맞으면 싱싱한 몸인걸 아무도 내 노래를 막지 않았다 *虛聲:앓는 사람이 정신을 잃고 중얼거리는 말 시작노트: 나이에 대한 자기 목소리

자작글-021 2021.06.02

새파란 볼기에 찍힌 지문들

새파란 볼기에 찍힌 지문들/호당. 2021.5.30 힘차게 달구어 낸 분필 향이 어린 머리에 내릴 때 내 지문을 새파란 낯짝에 꽉꽉 박아주었다 출간 소식이 흘러들어 50여 년 전에 찍힌 지문들이 봄꽃을 피워 보냈다 내 필름은 희끗희끗 낡아 흐릿하게 인화되는 것보다 전혀 재생되지 않는 것이 많다 그들도 퇴역한 70대 무임승차 세대 골고루 짙게 찍었더라면 자괴심은 덜할 텐데 내가 내린 지문을 지워주지 않는 것만 해도 과분해 봄볕이 더욱 진한 메시지를 박아준다

자작글-021 2021.05.30